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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서리의 시각 7 벚꽃놀이 중에 잃어버린 가방
2012년08월08일(水)22시55분
누구라도 거미줄처럼 정연하게 얽혀있는 숱한 제도의 슬하에서 곱게 길들여지며 살아간다. 더러는 그것의 억압에 얽매여서, 또 그 구속에 혹독하게 치이며 살아가기도 하지만, 대체로 제도들은 인간의 모듬살이를 다소나마 편하게 만들어주는 관건이라고 해야 옳다. 쓰임새가 다르고 제한적이긴 해도 ‘관습’이나 ‘법규’도 실은 ‘제도’와 같은 맥락의 어떤 규범으로써 사람을 위해서라기 보다도 세상의 질서를 도와주는 한 방법일 뿐이다.
그런데 이 제도가 한껏 느슨하게 꾸려지는 나라가 있는가 하면(형편에 따라 몇 명이라도 거느릴 수 있는 일부다처제를 허용하는 언어권을 둘러보라), 빈틈없이 짜여 있어서 편리/불편을 동시에 떠안기는 ‘문명국가’도 있다(제도권의 의무교육을 강제하는 ‘민주공화국’들을 상기하라). 물론 두 경우 다 일장일단이 있다고 봐야 ‘가치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을 테지만, 오늘날 지구촌의 역사 진행은 단연코 후자의 세련미와 정확성을 추종하는 쪽으로 흘러가고 있음은 보는 바와 같다.
그 제도의 운영면에서 아무래도 한국은 일본보다 엉성해서 털털거리며 억지로 굴러가는 자동차 같다는 느낌이 없지 않다. 한동안 조마조마하며 불안에 떨어대다가 한순간 그 제도 덕분에 날아갈듯한 해방감을 맛본 나의 비장의 경험담을 토로하면 다음과 같다.
1996년 4월 중순경, 나는 일본의 현역문인들인 부마 모토히코(夫馬墓彦)씨와 나카자와 게이(中沢けい)씨의 공동 초청으로 그동안 말로만 듣던 본바닥의 벚꽃놀이 곧 하나미(花見)에 참석할 행운을 얻었다. 그 기회가 내게 주어진 것은, 그 전해 11월에 시마네(島根)현 마츠에(松江)에서 열린 일한문학 심포지엄에 참가했다가, 솔직히 털어놓으면 2박3일 동안 문학담론보다는 취중진담을 서로간의 눈치/필담/통역으로 진지하게 주거니받거니하던 중 나의 음주벽을 그나마 그럴듯하게 받는지 여러 일본 문인들이 내년에 다시 ‘사적(私的)으로’ 만나자는 제의를 내놓아서였다.
 첫날 밤은 부마씨 집에서 묵기로 했으므로 도쿄에 떨어지자마자 오미야(大宮)시까지 전철로 이동했다. 그럭저럭 해거름이었으므로 마중나온 몇몇 분과 함께 곧장 인근의 대공원까지는 택시를 이용했다. 아마도 오미야 공원이었던 것 같고, 벌써 한밤의 하나미를 즐기려는 상춘객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자리를 펼치고 있었다. 가족 단위의 소규모에서부터 직장 단위의 대규모까지 다양한 모임들이 가로등의 적당한 조명 아래서 화기애애하니 웅성거리고 있어서 과연 장관이었다. 우리 일행도 아직 만개하지 않은 벚꽃을 감상하느라고 한동안 어슬렁거리다가 준비해온 비닐 깔개들로 널찍한 자리를 고목 밑에 보았다. 속속 일본문인들이 도착했고, 개중에는 마츠에에서는 못 본 원로의 문학평론가 한 분을 비롯해서 대학교수도 여러 명이나 있었다. 이내 술판이 벌어졌는데, 그것이야말로 일본의 고유한 풍속인지 참석자들은 제가끔 향토의 일본술을,또 각자의 집에서 만들었거나 소문난 음식점에서 사온 먹을거리들을 내놓았다. 삽시간에 떡 벌어진 진수성찬이 마련되었다. 
 나는 손님답게 권하는 대로 아무 술이나 마구 벌컥벌컥 들이켰다. 한창 때였고, 멋진 술자리여서 내 폭음벽이 발동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때서야 미즈와리라는 그 소위 물탄위스키가 일본의 애주가들 사이에는 거의 보편화되어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술에 또 분위기에 한껏 취해서 그랬을테지만 그날밤이 별밤이었는지, 달이 좋았는지는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이튿날 아침, 깨어 보니 그즈음 혼자 살고 있던 내 연배의 부마씨 아파트였다. 당연히 작취미성이었다. 그런데 어깨에 걸치고 다닌 내 조그만 헝겊 가방이 안 보였다. 하나미 술판이 끝난 후 어느 문인의 집으로 몰려가 역시 폭음 행각을 벌였고, 택시를 타고 왔다는데, 여권∙지갑∙돈, 전화번호와 은행구좌번호 따위를 적어놓은 수첩 등이 들어 있는 그 귀중품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난감했다. 우선 분실 신고를 해야 하나, 여권을 재발급 받는데 보름 이상 걸린다는데 그 동안 내 행방은 어떻게 되는가 같은 걱정부터 앞섰다. 수상쩍게도 나의 그런 노심초사를 놀리듯이 집주인 부마씨는 기다려 보자면서 연방 싱글거리기만 할 뿐이었다.
 아마도 오전 11시쯤이었을 것이다. 인근의 파출소에서 전화가 걸려와, 부마씨라는 집주인이 있느냐고, 거기에 혹시 한국인이 있는가 하고 묻는 모양이었다. ‘한국인’ 누구는 여권으로 곧장 알았고, 보따리의 주인을 찾자니 수첩을 뒤져볼 수밖에 없었는데 거기에 바로 이 지역 주민인 부마씨의 주소와 전화번호를 발견(?)했다는 것이었다.
부마씨와 함께 득달같이 파출소로 달려갔다. 어떤 중년남자가 길에서 내 가방을 줏었다며 신고해 왔다는 것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가방 속에는 내 전재산과 내 분신들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다. 너무나 고마워서 그 신고자가 누구냐고 물었더니, 익명을 원해서 경찰측도 그 신원을 알 수 없다며 다만 지갑 속의 돈 중 10%는 습득자가 가지고 갔다고 했다. 부마씨는 여전히 싱글거리면서 그것이 일본의 ‘룰’ 이라고, ‘마’ 이해하라고 했다. 희한하게도 한국돈도 제법 있었는데 거기에는 예의 그 ‘룰’을 적용치 않고, 사전류나 화집이나 지도책을 사서 돌아가려고 환전해 온 거금(!)의 내 일본돈에서만 10분의 1을 빼내 습득자에게 건네준 모양이었고, 신고자는 그것을 당당히 요구해서 받아갔다고 했다.
 참으로 편리하고, 합리적이기까지 한 제도였다. 분실물을 발견, 신고한 사람의 성의와 수고에 대해 ‘제도적으로’ 꼭 10%만 사례하는 관습의 일상화라니!
이런저런 생각거리가 워낙 많아서 부마씨와 인근의 고수부지를 한동안 산책하며 나는 시종일관 묵언으로 진땀을 흘렸는데, 물론 잃어버린 사전 한 권값에 해당하는 그 ‘사례비’ 때문만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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